부동산기획기사

변함 없는 대한민국 1번지

중개사 2009. 5. 4. 22:44
[新서울견문록 ⑤-1 종로구]
변함 없는 대한민국 1번지
빌딩 숲으로 흐르는 역사와 전통의 멋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사옥에서 내려다본 종로 야경.

나는 고등어가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비린내가 좋다. 고등어의 참맛을 처음 느낀 때는 5년 전 가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산 뒤 나오던 참이었다. 와퍼 버거를 사먹으려고 ‘버거킹’ 쪽으로 걸어가는데 옆 골목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그 골목의 이름은 피맛골. 이 명칭은 ‘피해 가는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했다.

피맛골의 첫 가게인 ‘열차집’은 6·25전쟁 직후 문을 열었다. 녹두를 갈아 만든 반죽을 돼지기름으로 부쳐낸 빈대떡이 일품. 낙지볶음과 ‘불판’으로 유명한 ‘서린낙지’로 이어지는 골목엔 버석버석한 생선구이를 내놓는 식당들이 늘어섰다. 그중 한 곳인 ‘함흥집’에선 최영민(67), 김용조(66) 씨가 고갈비를 씹으며 반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투가 귀에 익었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억양이었다. “고향이 서울이시죠”라고 내가 물었다. 지긋한 서울내기가 쓰는 말엔 표준어와는 다른 ‘서울 사투리’가 있다. ‘~했구요’ ‘~읍습니다’ ‘~하시어요’ ‘삼춘’ ‘이예쁜’ 같은 말이 그렇다.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유의 억양도 있다. 최씨는 종로구 청진동, 김씨는 종로구 운니동이 고향이라고 했다.

“매일 점심은 여기 와서 먹어. 우리처럼 고향이 눈에 밟히는 사람들도 없을 거여요.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은 비웃겠지만서두. 교보문고 터엔 맑은 샘물이 있었거든. 물맛이 지금도 입에 아른거리네그려.”(최영민 씨)

겨울의 금원은 바늘잎나무가 만드는 숲소리가 매력이다. 작은사진 함흥집

고등어구이 정식을 뜨던 나는 두 어른과 합석했다. “종로가 고향이다. 가회동에서 태어났다”고 했더니 한 어른이 팔을 낚아챘다. 함흥집의 바깥주인이었다. 김용조 씨는 40년 넘게 이 골목에서 고등어를 구웠다. 작고한 어머니 대신 고향에 남아 숯 냄새를 맡는다. 그가 1960년대부터 스크랩한 신문을 꺼내왔다. 피맛골을 다룬 신문기사를 꼼꼼히 모았다고 했다.

‘함흥집’이 내놓는 고등어구이는 달았다. 그날부터 나는 고등어가 좋아졌다. 내가 주6일 야근(취재를 빙자한 술자리가 더 많다!)하는 탓에 저녁을 늘 혼자 먹는 아내에게 일요일이면 고등어를 구워달라고 졸랐다.

‘종로구’라는 자치구 명칭은 조선왕조 때 육의전(六矣廛·국가 수요품을 납품한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이 섰던 길의 일제강점기 이름에서 나왔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이 지역의 방(坊) 계(契) 동(洞)을 합쳐 6개 구역으로 나눴다. 경성부(京城府) 종로1정목~종로6정목(지금의 종로1가~ 6가)이 그것이다.

세종로 네거리 한쪽 모퉁이엔 비각(碑閣)이 서 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보위에 오른 지 40년을 기념해 세워진 것이다. 이 비각으로 들어가는 돌문에 쓰인 ‘만세문’이라는 글씨는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섯 살 때 쓴 것이라고 한다. 이 비각부터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에 이르는 길이 종로다. 그 대로의 뒷골목이 피맛골.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