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호황 타고 무분별 대출 전체 잔액 60조원 넘어서 불황 닥치자 연체율 급증
"정말 피가 마르는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지…."
부동산 개발업체(시행사)인 A사의 김모 대표는 지금까지 수도권과 지방에서 4건의 주택 사업을 성공리에 끝마쳤다. 그런데 지난 9월 말 날벼락을 맞았다.
수도권에서 새로 1000여가구 아파트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2년 전 약 200억원을 대출해 줬던 B보험사로부터 예상치 못한 상환 요구가 들어온 것. 금융기관이 부동산 개발사업에 대해 대출해 주는 이른바 '프로젝트 파이낸싱'(PF·키워드) 대출이었다. 김 대표는 보험사에 "지금 돈을 빼면 사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면서 만기 연장을 읍소(泣訴)했지만 "우리도 유동성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일단 모면했다. 김 대표는 자신의 집과 예금을 맡겼고 시공을 맡은 C건설사도 예금을 담보로 제공한 끝에 보험사로부터 겨우 2개월 만기 연장을 받아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이달 말까지 다시 돈을 구하러 다녀야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저축은행의 PF대출 비중과 연체율이 높아 감독 당국이 상당히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지난달 30일 경제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5명 중 4명이 부동산 PF대출을 향후 경기를 위협할 '뇌관'으로 꼽았다. 도대체 PF가 뭐기에?
원래 부동산 PF는 아파트나 오피스텔, 상가 등 각종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예상되는 미래 수익을 기초로 자금을 미리 조달하는 방식이다. 일반 대출과 달리 부동산 등 담보가 필요 없다. 금융기관은 사업의 수익성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
그런데 2000년대 초부터 국내에 등장한 PF 기법은 서구 방식과는 다소 다르다. 시행사의 낮은 신용을 보강하기 위해 시공사(건설회사)가 금융기관에 지급 보증과 채무 인수, 책임 분양(키워드) 등 다양한 형태로 리스크를 대신 떠안아 준다. 기존 담보 대출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셈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아파트 개발 사업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보통 PF를 이용한 부동산 개발 방식은 2단계로 추진된다. 1단계는 아파트 건축을 위한 토지 매입 자금을 융통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선 지자체의 사업 승인도 나지 않은 상태이고 사업의 불확실성이 높아 대개 은행은 참여하지 않으며 저축은행이나 캐피탈·보험사 등 제2금융권이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액이 클 경우 여러 금융기관이 동시에 참여하기도 한다. 대신 시행사는 가산금리와 수수료 등 여러 명목으로 은행 대출금리의 2~3배, 많게는 연 20~25%에 이르는 금융비용을 부담한다.
2단계는 사업 승인이 떨어져 은행이 대출에 참여하는 단계이다. 사업 승인이 나면 부동산 개발업체(시행사)는 아파트 분양에 들어가고 계약금이 들어오게 돼 사업의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이때쯤 제2금융권은 대출을 회수하고 은행이 대출을 인수한다. 은행은 일반적인 기업 대출에 비해 1~2%포인트 높은 금리를 받을 수 있고 아파트 계약자에 대한 중도금 대출을 해줄 권리를 확보한다는 이점이 있다.
이 같은 PF 금융기법은 부동산 시장이 호황에 진입한 2002년 이후 아파트는 물론 오피스텔·상가 등 사실상 모든 개발 사업으로 급속히 확대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을 누리는 한 시행사나 건설회사, 금융기관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본이 없는 영세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적은 돈과 낮은 신용으로도 대출을 받아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헤지펀드처럼 레버리지(leverage· 차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 부동산 개발업체인 솔렉스플래닝 장용성 대표는 "대부분 시행사는 자기자본 대비 평균 20~30배의 레버리지를 이용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금융기관들 입장에서는 PF가 저금리 시기에 눈이 번쩍 뜨이는 고수익원이었다. 물론 부동산 개발 사업이 실패할 경우 최종적인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지만 시공사의 보증을 받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불안을 덜 수 있었다. 건설회사는 공사 일감을 따내서 좋았다. 물론 건설사는 시행사가 받은 대출에 대해 채무 인수나 책임 준공, 책임 분양 등 사실상 지급 보증과 유사한 채무를 떠안는다. 하지만 이런 채무는 통상 시공사의 재무제표에는 부채로 기록되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부동산 경기 호황을 타고 부동산 PF시장은 급격하게 확대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금융권(여신 전문회사 제외) 전체 PF대출 잔액은 60조원을 넘었다. (이 중 저축은행이 12조원을 차지한다.) 이는 2006년 말의 37조원에 비해 1년 반 만에 60% 급증한 것이다.
부동산 PF대출이 전체 여신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은행권의 경우 2%대에서 4%대로 뛰었다. 저축은행은 2년 전 6% 미만이던 대출 비중이 14%로 2.5배 가까이 치솟았다.
부동산 PF대출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면서 증권사도 뛰어들기 시작했다. 증권사는 대출을 해주는 대신 채권이나 어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제공했다. 'PF 자산담보부증권'(ABS)과 'PF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키워드)이 그것이다. 부동산 개발사업의 현금 흐름을 담보로 하는 유동화 증권의 일종이다.
증권사는 이런 증권을 스스로 인수하기도 하고 기관투자자와 개인투자가에게 팔기도 했다. 증권사는 이렇게 조달한 자금을 부동산 개발업체에 융통해 주고 이자와 수수료를 벌었다. 메리츠증권에 따르면 지난 2002년 6000억원대에 불과하던 PF방식 유동화증권 발행 잔액은 현재 약 30배에 이르는 17조원대로 확대됐다. 특히 ABCP는 작년 말 발행잔액이 3조원이던 것이 올 6월 말에는 4조5000억원으로 50% 급증했다.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와 닮은 점은?
그러나 한국형 PF의 '마법(魔法)의 공식(公式)'은 주택시장이 급격히 추락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부동산 PF는 아파트·오피스텔·상가 등을 판매해 들어오는 분양수익금으로 대출금을 갚는 구조인데 지금처럼 아파트가 팔리지 않으면 돈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쳐 금융기관은 기존 PF 대출의 만기 연장을 거부하거나 자금 회수에 나서 PF 부실화 위험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형 PF는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와 여러 모로 닮은 꼴이다. 첫째, 서브프라임모기지가 신용 불량자에게도 집값의 80~90%까지 대출해 줬던 것처럼 PF대출도 대상 사업에 대한 철저한 수익성 검토 없이 집행된 경우가 적지 않다. (노익호 한국신용평가 연구위원) 지난 2005년 이후 지방 주택 시장에선 미분양이 쌓여갔지만 PF대출은 줄어들지 않았다.
둘째, 서브프라임 사태의 경우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부채담보부증권)라는 증권화(證�化·securitization)된 파생금융상품이 위험을 확산시킨 것처럼 부동산 PF도 앞서 설명한 ABS나 ABCP의 형태로 증권화돼 시중에 팔렸다.
셋째, 미국 주택 가격 급락이 서브프라임 사태를 촉발한 것처럼, 한국도 집값 급락이 PF 대출시장 부실화를 불러오고 있다는 점이다. 집값이 급락하면서 PF대출 연체율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 PF대출 연체율은 2006년 말 0.23%이던 것이 올 6월 말에는 0.68%로 올라갔다. 저축은행의 사정은 보다 심각하다. 같은 기간 연체율이 10.3%에서 14.3%로 뛰었다. 한국금융연구원 김동환 선임연구위원은 "저축은행의 경우 엄격한 심사 없이 지방 중소 건설사의 사업성이 낮은 사업까지 대출해 줘 연체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한양대 김관영 교수는 "작년 8월 아파트 분양제도가 강화되기에 앞서 미리 PF 대출을 받아둔 사업이 엄청나게 많다"면서 "지금처럼 경기 침체에 따른 미분양 적체가 지속되면 내년 하반기 이후 만기 도래하는 PF의 상당부분은 부실화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PF 관련 금융 중에서 가장 발등의 불이라 할 수 있는 것이 ABCP 시장이다. ABCP는 일종의 기업어음인데 만기가 통상 90일 미만이다. 따라서 만기가 닥칠 때마다 만기가 연장(차환발행·revolving)돼야만 한다. 2~3년의 기간을 요구하는 부동산 개발사업과는 맞지 않는 단기적 자금조달 방법인 것이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최근 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ABCP 차환 발행이 벽에 부딪혔다. (앞서 예를 든 A시행사의 사례처럼) 돈줄이 막혀 사업이 좌초하고 시행사가 부도를 낼 경우 지급보증을 해줬던 건설사에 불똥이 튀게 됨은 물론이다.
시공 능력 40위권의 모 건설사가 최근 1차 부도 위기를 맞았던 이유도 시행사가 만기가 돌아온 ABCP 상환에 어려움을 겪었던 때문으로 알려졌다. 메리츠증권 최은영 전임연구원은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올 ABCP 중 약 1조원은 금융권의 매입 약정이 없어 차환 발행 여부가 불투명하다"면서 "이 경우 일부 건설사는 부도 위기에 몰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차환 발행이 가능한 경우도 금리가 연 7%에서 최근엔 13~15%까지 치솟은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츠증권은 지난 5월에 낸 보고서에서 "부동산 프로젝트의 실패가 건설사 부도로 이어질 경우 해당 건설사가 채무 인수나 지급 보증을 했던 다른 프로젝트의 연쇄적인 부도로 전염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부동산 개발업체나 건설회사가 PF 부실을 처리하는 방법으로는 미분양 아파트를 헐값에 처분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집값 하락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건설회사들의 자금 악화설이 나오는 것은 PF 부실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증시에 상장된 25개 건설회사의 평균 부채비율은 201%여서 겉으로는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굿모닝신한증권 보고서(10월21일)에 따르면 하지만 부동산 개발업체에 대한 채무 인수나 지급 보증까지 감안한 부채비율(수정 부채비율)은 437%에 이른다. 모 대형 건설사 임원은 "겉으론 멀쩡하지만 속으론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안고 가는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PF 부실 파장 과연 어디까지 번질까?
그러나 부동산 PF가 문제이긴 해도 미국의 서브프라임과 비교하면 그 절대적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유정석 수석연구원은 "6월 말 현재 저축은행 연체율 14.3%가 전액 부도 나더라도 대손충당금이나 토지 담보 등으로 저축은행이 자체적으로 흡수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은행의 경우엔 총 대출 중 PF대출 비중이 4.4%에 불과하고 손실 흡수능력이 189%(이 수치가 100%가 넘으면 전액 보전이 가능하다는 의미임)에 달해 큰 문제가 안 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또 PF대출은 서브프라임모기지와 달리 유동화(증권화)된 부분이 많지 않고 2차, 3차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생상품이 확산되지 않았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금융감독당국 고위 관계자는 "PF 대출이 경제 시스템 전체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은 적다"면서 "문제는 근본적인 주택시장 침체, 미분양 아파트 이런 게 얼마나 확산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원래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석유·탄광·조선·발전소·고속도로 건설 등의 사업에 흔히 사용되는 방식으로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금융기법이다. 프로젝트 자체를 담보로 장기간 대출을 해주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에선 부동산 개발 금융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자금과 신용이 부족한 영세 부동산 개발업체가 향후에 발생할 분양 수익금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지급 보증, 채무 인수, 책임 분양
금융기관들이 부동산 개발업체에게 PF 대출을 제공할 때 자금력 있는 건설회사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채무불이행 위험을 대신 떠안아 주는 것이 관행이다. 지급 보증, 채무인수, 책임분양 등이 대표적이다. 지급 보증은 시행사가 파산해 PF대출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건설회사가 대신 금융기관에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의무를 말한다. 채무 인수는 시행사가 부도나면 채무를 인수하되 즉시 상환할 의무는 없다. 책임 분양은 준공 이후 일정 시점까지 건설회사가 전체 분양 물량의 일정 부분을 책임지고 분양해야 하는 의무이다. 예컨대, 책임분양을 50%로 약정했지만 30%밖에 분양되지 않으면 건설사는 20%에 해당하는 분양 대금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런 의무들은 우발채무로 분류돼 건설사의 장부에 부채로 기록되지 않는다.
■PF ABS(자산담보부증권)·PF ABCP(자산담보부 기업어음)
아파트·오피스텔 등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향후 발생할 분양수익금을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과 어음을 각각 지칭한다. 통상 증권사가 주관해 발행하며, 은행·보험·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이 주로 사들인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을 부동산 개발업체에 제공하면, 개발 업체는 분양대금으로 원리금을 갚아나가게 된다.
PF ABS는 만기가 2년 이상인 반면, ABCP는 만기가 90일 이내로 짧다. 단기 자금이라 발행 금리는 ABS보다 싸지만, 공기가 2~3년씩 걸리는 부동산 개발사업의 경우, 사업이 끝날 때까지 8~10번 정도 만기를 연장(차환 발행)해야 하는 게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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